낯선 길위에서

프로방스의 낭만과 여유로움,

그리고 지베르니의 여운

프랑스이기도 하고 스페인이기도 하고 이탈리아기도 한 곳, 독특한 로컬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프로방스 지역으로 떠나는 여행은 언제 떠나도 즐겁다. 장소 자체의 아름다움도 크겠지만, 여행하는 동안만은 삼무(三無)의 시간을 보내기 때문이 아닐까. 노동하지 않고, 인터넷하지 않고,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는 것. 이 세 가지 무위(無爲)야말로 여행에 서린 원초적인 구원의 열쇠다. 이걸 평상시에 끊어내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지만, 여행하는 동안은 저절로 삼무의 시간을 갖게 되니 요동치던 마음의 파도는 쉽사리 가라앉는다. 일상적 스트레스의 주요 원인이 손쉽게 제거되니 여행은 낯선 장소의 자극에 따라 보송보송한 찰흙처럼 자꾸만 형태를 바꾸는 내 마음을 바라보는 여백의 시간을 준다.

여행자에게 머무는 여유로움을 가르쳐 준 곳, 프로방스 여행은 어떤 건강보험보다 확실한 마음의 보험이다. 여행의 추억이 언젠간 좌충우돌할 것임에 분명한 미래의 내 지친 어깨를 쓰다듬어줄 것임을 믿는다. 일상 속에서는 설렘을 느끼기가 점점 어려워지지만, 여행하는 동안에는 시도 때도 없이 조금은 주책없이 사소한 자극에도 심장이 두근거린다. 일상 속에서는 외부자극에 마음을 닫아두고 입술을 최대한 한일자로 다무는 것이 자기방어기제가 되지만, 여행하는 동안에는 그 익숙한 자기방어의 자물쇠가 풀려버린다. 파리의 유람선 바또무슈를 타는 사람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낯선 여행자들에게 미친 듯이 손을 흔들어준다. 나도 따라서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런 내게 끝없이 천천히 걷고 싶은 여행의 아름다움을 가르쳐준 곳, 다음 목적지에 대한 스트레스 없이 그저 그곳에 머무는 여유로움을 가르쳐준 곳이 바로 프로방스지방이다. 아비뇽, 아를, 레보 드 프로방스, 생 레미 등의 장소들을 둘러보면서 나는 프로방스 특유의 여유와 아름다움을 배웠다.

낙천가들의 도시, 아비뇽 아비뇽의 거리에는 햇살의 찬란함과 프로방스 특유의 유난히 높고 푸른 가을하늘, 그리고 일부러 멋을 내지 않아도 저절로 멋이 우러나오는 사람들의 행복한 미소가 아른거린다. 아비뇽 거리를 돌아다니다 보면 여기저기서 라벤다 향기를 비롯한 각종 허브 향이 가득한 비누냄새가 피어오른다. 오색찬란한 마카롱 같기도 하고 무지개빛 같기도 한 그 비누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새로운 상상력이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것 같다. 다이앤 레인 주연의 영화 <파리로 가는 길>에서도 아비뇽 풍경이 잠깐 나와 반가웠다. 아비뇽은 기차로 프로방스 여행을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편리한 교통의 요지다. 아비뇽의 날씨는 전형적인 프로방스의 매력을 그대로 드러낸다.

(생레미의 생폴드모졸 요양원에는 고흐의 흔적을 찾으러 온 사람들이 많다. 아름다운 생 레미의 하늘과 드넓게 펼쳐진 들판은 프로방스의 전형적인 풍경이다.)

내가 아비뇽에 도착하는 날 밤에는 억수같은 비가 내렸지만 그날 밤 아비뇽의 밤하늘에서는 찬란하게 별들의 축제가 벌어졌고 그 다음날에는 언제 비가 왔냐는 듯이 청명한 가을하늘이 펼쳐졌다. 아비뇽에 사시는 분들의 말씀을 들어보니, 그 전날 비가 오면 다음 날에는 날씨가 맑을 확률이 더욱 높아진다고 한다. ‘에이, 오늘 비가 오네, 내일도 흐리겠네’라고 비관적으로 생각했던 나의 마음이 활짝 개는 느낌이었다. 날씨와 심리는 마치 바늘과 실처럼 너무도 가까운 존재다. 프로방스 지역을 여행하다 보면 아무리 비가 와도 ‘응, 어차피 곧 파란 하늘을 보게 될 텐데, 뭐!’하고 낙관하게 된다. 10월초에도 억수같이 내리는 비에 날씨가 확 추워졌다가도 1시간 후엔 금방 하늘이 환해지고 햇살이 따가워져 외투를 벗고 여름옷 차림으로 걸어 다니게 된다. 이 지역을 여행하다 보면 저절로 낙천적인 사람이 되는 것 같다. ‘구름이 끼는 걸 보니 내일 비가 오겠네’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구름이 끼면 내일은 맑을 확률이 더 높아지잖아, 내일은 소풍이나 가야겠다’라고 생각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동안 얼마나 비관적이고 우울한 태도로 나 스스로를 괴롭혔는지 깨달으니, 남프랑스의 가을하늘을 바라보며 더 밝고, 더 환하게 미소 짓는 법을 배우고 싶어진다.

여행자들의 두려움, 그리고 여행할 권리

아비뇽에 도착해 보니 스페인과 프랑스, 이탈리아의 모든 문화를 만날 수 있는 프로방스의 전형적인 풍경이기도 했다. 오랜만에 짐 캐리 주연의 영화 <트루먼 쇼>를 보니 ‘여행할 권리’야말로 인간의 소중한 권리라는 생각이 든다. 어린 시절 뱃놀이를 갔다가 아빠를 영원히 잃어버린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는 트루먼은(물론 알고 보니 이것도 ‘트루먼쇼’라는 기상천외한 실시간 생방송 콘텐츠를 제작한 기획자들의 농간이었다) 어디론가 멀리 떠나는 것을 두려워한다. 물도, 여행도, 이직도 두려워한다.
‘직장을 그만두고 여길 떠나면 어떨까’라고 상상해 보는 트루먼을 모두가 말린다. 집을 사기 위해 은행에서 빌린 대출금도, 자동차 대금도 다 갚지 못했다며 말리는 아내도 물론 ‘트루먼쇼’의 여배우다. 막상 트루먼 자신도 평생 한 곳에서만 살아 어딘가로 떠나는 것이 두렵기만 하다. 이론적으로는 떠날 수 있지만 실제로는 한 번도 떠나본 적이 없는 트루먼은 단지 방송 세트 안에 갇혀 살아서만이 아니라 그 어디도 ‘여행할 권리’를 누려본 적이 없기에 그토록 자신도 모르게 갑갑함을 느꼈던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평생 한 곳에서만 산다면 트루먼 쇼의 주인공처럼 그 어느 곳으로도 진정으로 떠날 용기를 낼 수 없는 영원한 정착민이 되지 않을까. 나는 <트루먼쇼>를 보며 여행할 권리야말로 우리 삶을 더욱 자유롭고 눈부시게 만들어주는 힘이라는 생각을 했다. 프로방스 여행은 내게 아를의 눈부신 햇살, 아비뇽의 푸르른 하늘, 생 레미의 아기자기한 골목길 풍경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갑갑한 일상의 탈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아를, 노란집 그리고 밤의 카페

아비뇽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아를에는 빈센트 반 고흐의 흔적과 로마시대의 유적들이 가득하다. 아를의 거리를 걷다 보면 고흐가 고갱과 살았던 노란집, 고흐가 ‘밤의 카페 테라스’를 그린 아름다운 카페, 고흐가 고갱과의 다툼 끝에 귀를 자르고 머물렀던 요양원, 고흐가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행복해 했던 골목길들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프로방스의 눈부신 하늘과 드넓은 벌판, 계절마다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꽃들과 사이프러스 나무를 사랑했던 고흐는 아를에서 자신의 진정한 스타일을 발견하게 된다. 고흐는 타오르는 밀밭 사이로 부지런히 움직이는 농부들의 쟁기질을 사랑했으며, 아를의 눈부신 하늘 아래 온갖 향기를 뿜어내며 피어나는 꽃들에서 인생의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생 레미의 골목길에는 고흐가 자화상을 그렸던 장소들, 생폴 드 모졸 요양원에서 머물렀던 시간 속의 위대한 창작의 열정이 느껴진다.

레보 드 프로방스, 빛의 채석장

생 레미와 함께 추천하고 싶은 또 하나의 프로방스 도시는 레보 드 프로방스다. 프랑스인들이 뽑은 가장 아름다운 도시 Top10 안에 자주 드는 곳이다. 프로방스의 아름다운 자연과 맛 좋은 음식, 와인으로 유명한 곳이다. 이곳에는 ‘빛의 채석장’이라는 거대한 문화예술공간이 있다.

지베르니, 모네의 모든 것

프랑스에서 추천하고 싶은 또 하나의 여행지는 지베르니다. 지베르니는 모네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아름다운 장소다. 젊은 시절의 모네는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 자신을 떨리게 하는 색채를 찾아 세계 곳곳을 여행했다. 하지만 몇 번의 실패를 거쳐 지베르니라는 ‘인공의 낙원’을 만들어내고는 더 이상 세계를 떠돌지 않았다. 거의 15년 동안 ‘여행 열병’에 걸려 조금이라도 짬이 나면 어떻게든 배낭여행을 떠났던 나도 모네처럼 ‘마음의 정원’을 만들고 싶었다. 세계를 이리저리 떠돌 필요 없이 내 작은 집이 곧 소우주이자 완전한 세계인 양, 소박하게 자족할 수 있는 곳. 모네의 정원처럼 거대하지는 않더라도, 내가 가꾸는 나무, 내가 가꾸는 꽃 몇 송이는 생겼으면 좋겠다. 지베르니 전체가 온갖 색채의 향연이 펼쳐지는 거대한 팔레트였고, 모네는 호수의 물빛과 하늘빛, 바람의 세기와 태양의 광선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수련의 모습을 때로는 춤추는 요정처럼, 때로는 명상에 잠긴 수도승처럼 그려내기 시작했다. 호수에서 피어나는 평범한 수련이 그토록 천변만화한 표정과 몸짓과 색채로 이 세계를 수놓을 수 있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커다란 감동을 느꼈다.

단순히 관상용으로 심었던 수련이 이제는 다시 없는 뮤즈가 되어 모네로 하여금 끊임없이 새로운 빛의 세계로 인도하고 있었다. 파리에서는 무뚝뚝하고 차갑다는 평을 들었던 모네가 지베르니로 이사하자 온화하고 자비로운 사람으로 변했다며 반기는 사람들도 많았다. 과묵하기로 유명한 모네를 인터뷰하기 위해, 그리고 이제는 ‘인상파의 전설’이 되어버린 지베르니의 연못을 독자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기자들이 앞 다투어 지베르니로 찾아왔다. 모네가 굳이 파리로 나가지 않아도 사람들이 모네를 끊임없이 찾아왔다. 모네의 눈부신 화폭의 비밀이 마치 이 정원에 숨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모네는 두 번째 아내 알리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 심장은 항상 지베르니에 머무르고 있소.” 지베르니에는 예술의 심장, 아름다움의 심장, 그리고 아름다움에 감동할 줄 아는 사람들이 품은 공감의 심장이 아직도 펄펄 살아 숨 쉬고 있다.

유럽 여행을 다니다 보면 다정하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이 많다. 카페에는 모르는 사람에게도 왁자지껄하게 건배를 청하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이런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마음의 빗장을 닫아둘 수가 있겠는가. 여행을 할 때마다 점점 말랑말랑해지는 내 영혼은 스스로를 이렇게 타이른다. ‘아직은 느낄 수 있어, 이 세상의 온갖 아름다움을. 감정이 풍부한 것은 죄가 아니야. 섬세한 감정은 강인함의 또 다른 징후야.’

정여울 작가
<마흔에 관하여>, <내가 사랑한 유럽top10>,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저자
KBS1라디오 ‘백은하의 영화관, 정여울의 도서관’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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