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길위에서

뉴욕의 가을,

매일매일 새로운 나를 찾는 도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 로스앤젤레스로 가고, 무언가 새로운 존재가 되기 위해 뉴욕으로 간다.” <아이 하트 뉴욕I heart Newyork>의 작가 린제이 켈크의 말이다. 정말 로스앤젤레스처럼 자연의 아름다움과 온화한 기후를 가진 도시에서는 편안하게 ‘본래의 나’를 찾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뉴욕처럼 화려한 대도시에서는 뭔가 새로운 나, 또 다른 나, 알 수 없는 나를 향한 탐구의 열정이 샘솟는다.

영화 속으로 들어간 뉴욕 뉴욕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들은 주로 영화 속의 장면들이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에서 아직 사랑과 우정의 경계에서 서성이며 설레는 감정을 느끼던 해리와 샐리가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 센트럴파크의 거리를 걷던 모습. <뉴욕의 가을>에서 불치병으로 죽어가는 위노나 라이더의 꺼져가는 생명처럼 메마른 나뭇잎으로 뒤덮인 뉴욕 시내의 거리,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는 화려한 패션감각을 자랑하며 보무도 당당하게 거리를 걷는 사람들과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 있는 뉴욕의 마천루들, 그 속에서 항상 미친 듯이 뛰어다니는 주인공 앤 해서웨이의 모습이 떠오른다. <비긴 어게인>에서 묘사된 뉴욕은 화려한 고층빌딩보다는 ‘구석구석 아름다운 골목길들’의 모습이다. 거대한 마천루로 가득한 뉴욕의 대로변이 아니라 소박한 골목길 속에서 뉴욕의 새로운 얼굴을 발견한다. 모든 소음이 제거된 완벽한 스튜디오가 아니라, 건물의 옥상, 건물들 사이의 좁은 골목길 등 그야말로 뉴욕의 구석구석에서 신곡을 녹음하는 밴드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러나 진짜 뉴욕은 영화 바깥에 있다.

가장 강렬한 뉴욕을 만나다, 타임스퀘어 공연 관람뿐만 아니라 그저 거리를 걷는 것만으로도 뉴욕은 산책자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해준다. 내가 뉴욕에서 지낸 3주 동안 매일 자석에 이끌리듯 걸어간 곳이 있다. 그곳은 바로 타임스퀘어다. 이곳에 있으면 ‘여기가 뉴욕이로구나’하는 느낌이 가장 강렬하게 다가왔다.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현란한 포스터들, 전세계 대기업의 광고들이 한자리에 다 모인 듯한 화려한 전광판들. 뉴욕은 이 모든 것들을 사람들에게 펼쳐 보이면서 ‘손을 뻗기만 해요, 이 모든 것들이 당신 거예요!’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뉴욕에 가면 일단 워낙 ‘하고 싶은 일들의 리스트’가 많아서 무엇부터 해야할지 결정할 수 없는 대혼란에 빠질 수 있다. 차분하게 지도를 펼쳐 놓고 ‘어디부터 가야할까’ 고민을 해봐도, 지도 자체가 워낙 복잡하기 때문에 마음의 길을 잃기 쉽다. 그럴 땐 우선 타임스퀘어에서부터 시작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타임스퀘어에는 전세계에서 몰려든 여행자들과 뉴욕 현지인들이 뒤섞여 그야말로 ‘온세상 사람들이 여기 다 모여 있는 것 같은’ 즐거운 환상을 심어준다. 언어도 인종도 문화도 다른 사람들이 저마다의 개성을 물씬 드러내며 그저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뉴욕의 평범함을 만나다,
센트럴파크

두 번째 추천 장소는 센트럴파크다. 특히 ‘뉴욕의 가을’이라는 계절의 정취를 맛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센트럴파크에서 천천히 걸어보기도 하고, 연못에서 보트를 타보는 것도 좋다. 타임스퀘어는 전광판이 꺼지는 시간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24시간 뉴욕의 낮과 밤을 밝혀 때로는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지만, 센트럴파크는 ‘뉴욕 사람들의 하루’를 투명하게 보여주는 유리창 같다. 해가 뜨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산책을 하거나 조깅을 하며 센트럴파크의 아침을 깨운다.

낮이 되면 사람들이 저마다 핫도그나 샌드위치, 또는 집에서 마련해 온 도시락을 펼쳐놓고 점심을 먹기도 하고, 유치원에서 센트럴파크로 소풍을 나온 아이들과 선생님들이 노래를 부르며 줄지어 걸어가기도 한다. 여행자들은 마부가 이끄는 알록달록한 마차를 타고 센트럴파크를 한 바퀴 돌기도 한다. 워낙 거대한 공원이기에 도보로 산책하려면 한나절도 모자란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 보드를 타는 사람, 조용히 책을 읽으며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 춤을 추는 사람, 그야말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센트럴파크의 하루를 다채롭게 수놓는다. 내가 좋아하는 장소는 센트럴파크 안에 있는 셰익스피어 극장과 셰익스피어 가든이다. 셰익스피어의 명대사들을 팻말로 장식한 아름다운 정원이 가을의 정취를 더욱 물씬 뿜어낸다.

뉴욕의 황혼을 즐기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세 번째로 추천하고 싶은 장소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다. 세계 5대 박물관 중의 하나이기도 하지만,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매력은 단지 방대한 컬렉션에 그치지 않는다. 주변 환경과 이루는 조화가 더 매력적이다. 센트럴파크를 내려다보는 옥상 전망대는 그리 높지 않지만 뉴욕의 아름다운 풍광을 ‘메트로폴리탄의 시선’으로 세련되게 편집해서 보여준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있는 고흐의 자화상 고흐의 자화상과 사이프러스 나무 그림, 고흐의 해바라기와 모네의 수련, 고갱이 그린 타히티의 여인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과 ‘영원한 봄’, 드가가 그린 아름다운 발레리나와 베르메르가 그린 여인의 초상들, 그리고 클림트가 그린 아름다운 여인의 초상들까지. 이 모든 작품들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은 놀라운 곳이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커다란 기쁨을 느낀 사람들은 모마(Moma)와 휘트니 뮤지엄도 꼭 들러보길 바란다. 모마에는 고흐의 저 유명한 <별이 빛나는 밤에>와 <사이프러스>가 있고, 휘트니 뮤지엄에는 뉴욕 사람들의 고독과 우울을 화폭에 담은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걸작들이 있다. ‘프릭 컬렉션’에는 베르메르의 걸작들이 자리잡고 있다. 모마 미술관에는 르느와르의 피아노 치는 소녀, 클림트와 샤갈의 걸작들, 마티스의 걸작, 살바도르 달리, 프리다 칼로, 마크 로스코, 조지아 오키프, 에드워드 호퍼, 백남준의 걸작들이 쉴 새 없이 펼쳐진다. 휘트니 뮤지엄 안에 있는 카페에서 브라우니와 당근 케이크, 커피를 즐기며 저물어가는 뉴욕의 황혼을 바라보는 것은 뉴욕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또 하나의 축복이다.

뉴욕에는 뉴욕의 맛집이 있다 뉴욕의 명물 중 하나는 음식이기도 하다. 독특한 빵과 베이글로 유명한 러스 앤 도터스 카페(Russ &Daughters Cafe)는 연어와 치즈를 곁들인 향기로운 빵들이 뉴요커들을 사로잡는다. 에이미스 브레드(Amy’s Bread)는 수제 베이커리와 페이스트리로 유명한데, 12시가 되기도 전에 모든 빵들이 품절될 정도로 인기가 많은 곳이다. 곡물빵과 스콘, 크루아상과 파이 모두 일품이다. 블루벨 카페(Bluebell Cafe)는 풍부한 맛과 영양이 가득한 브런치로 유명한데, 감자와 햄, 다양한 해산물을 듬뿍 곁들인 브런치 세트는 여행자들의 입맛을 자극한다. 로어 이스트에 우치한 카츠 델리(Katz’s Deli)도 육즙 가득한 비프 샌드위치의 독특한 맛으로 유명하다. 영화 <스파이더맨>에도 등장했던 유명한 피자집 조스피자(Joe’s Pizza)도 뉴요커들이 사랑하는 피자 맛집이다. 스테이크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스미스 앤 웰렌스키(Smith & Wollenski)가 인기다. 해쉬 브라운과 함께 즐기는 스테이크의 풍미는 수많은 뉴요커들과 관광객들을 사로잡는다. 한국에서도 인기 있는 셱셱버거는 전세계에서 몰려든 관광객들로 밤늦게까지 문전성시를 이룬다.

뉴욕만이 가진 영원한 매력, 고향의 편안

<분노의 포도>를 쓴 작가 존 스타인벡은 뉴욕의 문제점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묘사한다. 뉴욕은 온갖 트러블로 가득한 도시이기도 하다고. 때로는 더럽기도 하고, 때로는 추하기도 하다. 그 변덕스러운 날씨는 악명 높고, 뉴욕시의 정책은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는 위협적이며, 교통은 미쳤으며, 경쟁은 살인적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오직 뉴욕만이 가진 영원한 매력이 있다고 한다. 존 스타인벡은 <미국 그리고 미국인들>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당신이 일단 뉴욕에 살기 시작한다면 뉴욕은 당신의 고향이 된다. 이 세상 그 어느 곳도 여기처럼 편안하게 느껴지지 않게 된다.”

다시 영화 속으로 들어가다, 브루클린 브리지 마지막으로 추천하고 싶은 장소는 브루클린 브리지다. 맨해튼과 브루클린을 연결하는 다리이다. 그저 그 위를 천천히 걷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운 풍경화나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되는 듯한 달콤한 환상을 심어준다. 브루클린에서 뉴욕 쪽으로 걷다보면 왼쪽으로는 저 멀리 자유의 여신상이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맨해튼의 마천루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뉴욕에는 세 가지 종류의 뉴요커가 있다고 한다. 첫째, 뉴욕에서 태어난 뉴요커(natuves), 둘째, 통근자 뉴요커(commuters), 셋째 이주민 뉴요커(settleres). 뉴욕에서 태어나고 뉴욕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뉴욕의 모든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뉴욕의 토박이들이다. 뉴욕으로 출근하는 사람들에게 뉴욕은 날마다 어마어마한 메뚜기 떼를 집어삼키고 매일 밤 그 메뚜기 떼를 뱉어내는 거대한 존재이다. 정착하기 위해 뉴욕을 찾는 사람들에게 이 도시는 어떤 곳일까. 그들에게 뉴욕은 곧 열정의 상징이다. 그들은 가장 열정적으로 뉴욕에서 무언가를 찾기 위해 분투한다. 여행자들은 세 번째 부류의 뉴요커와 많이 닮았다. 간절한 마음으로 무언가를 찾기 위해 뉴욕으로 떠나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뉴욕에 있으면 그것이 나와 직접적으로 상관없는 일이라도 설레고, 왠지 심장이 쿵쾅거리고, 세계의 뜨거운 중심을 매일매일 엿보는 느낌이 든다.

정여울 작가
<마흔에 관하여>, <내가 사랑한 유럽top10>,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저자
KBS1라디오 ‘백은하의 영화관, 정여울의 도서관’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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