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품으로 보는 역사

식품산업의 역사를 바꾼 테크놀로지 통조림의 탄생

식품산업의 역사는 ‘세균과의 전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류는 염장, 발효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식품의 유통기한(shelf life)을 늘리기 위해 노력해왔고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19세기 초 발명된 통조림은 식품산업의 역사를 바꿔놓은 중요한 테크놀로지였다. 밀폐된 통조림에 음식을 넣고 높은 온도로 가열하면 세균이 죽어서 유통기한이 비약적으로 늘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통조림 ‘테크놀로지’는 그후에도 지속적인 발전으로 오늘에 이르렀다.

전복통조림으로 시작된 통조림의 역사 우리나라 최초의 통조림은 1892년 전남완도에서 일본 수출용으로 만들어진 전복통조림이라고 한다. 해방 전에도 해방 후에도 통조림은 주로 수출용이었고 군수용이었다. 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것이 아니라면 부자나 먹어볼 수 있는 비싼 식품이 통조림이었다. 통조림을 만들 때 사용하는 공관(빈 캔)을 전량 수입해야 했기 때문이다. 1970년대에 들어서야 겨우 국내에서 공관의 생산이 가능해졌다. 1975년 11월13일자 매일경제신문 기사에 따르면 1975년 상반기 151개의 통조림 공장이 전국에 있었다. 대한종합식품, 조일산업, 미원식품, 화남산업의 4개 회사가 메이저였다.
제일 오래된 회사인 조일산업은 1929년 일본인이 영덕군 강구면에 세운 공장에서 출발했는데 지금은 사라진 별표 통조림으로 유명했다. 1962년 나주에 세워진 화남산업은 과일 통조림으로 유명한 돌(당시 캐슬앤쿡)의 투자를 받아 만들어진 합작회사이어서 국내에서도 과일 통조림으로 유명했다. 한때는 지역의 대표기업이었던 두 회사는 이제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워 졌다.

회사는 사라져도펭귄 브랜드는 살아남아 4개 회사 중 가장 유명하고, 지금도 그 브랜드가 남아있는 회사는 바로 ‘대한종합식품’이다. ‘펭귄’ 상표로 유명한 회사다. 1966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국영기업으로 만들어진 이 회사는 67년부터 3년간 월남C레이션 납품을 하면서 성장했다. 재미있는 것은 펭귄 상표가 삼성그룹의 제일제당으로부터 1968년 인수한 브랜드였다는 점이다. 식품산업 곳곳에 남아있는 삼성의 흔적 중 하나다.
이 회사는 1975년 벽산그룹에 인수되면서 민간으로 넘어가는데 이후 주스와 육가공에도 진출해 우리나라의 대표 식품회사 중 하나로 성장한다. 나중에는 아예 회사 명을 ‘펭귄’으로까지 바꿨다가 1991년 진로그룹에 인수돼 진로종합식품의 일부가 된다. 하지만 진로그룹이 IMF 금융위기로 어려움에 처하면서 통조림 사업부만 다시 ㈜펭귄으로 분사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한차례 부도를 맞았다가 2013년 펭귄F&B로 다시 재설립된다. 회사는 망해도 펭귄 브랜드는 살아남은 것이다.

그 통조림 회사들은 왜 사라졌을까 1975년도에 존재했던 통조림 회사들은 그런데 왜 지금은 다 사라진 것일까. 유통기한이 길다는 통조림의 장점은 유통기한을 늘릴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면서 점점 경쟁력을 잃어갔다. 1960년대 라면이 처음 등장했고, 1980년대에는 3분카레로 대표되는 레토르트 제품과 냉동만두로 대표되는 냉동식품들이 등장했다. 건조식품, 레토르트식품, 냉동식품이라는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면서 통조림의 기술적 우위는 약해졌고 이런 기술을 앞세운 식품회사들이 식품시장 성장의 파이를 가져갔다.

무엇보다 유통산업의 발달은 통조림의 필요성을 크게 떨어뜨렸다. 신선한 생선과 과일, 축산물이 바로 현지에서 슈퍼마켓과 마트에 공급되면서 유통기한이 긴 제품을 굳이 가정에 보관하고 있을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런 용도의 식품은 통조림 대신 라면, 레토르트, 냉동식품이 차지하게 됐다.

참치캔햄

하지만 두 가지 식품에서만은 통조림이 여전히 강세를 보이고 있다. 바로 참치와 캔햄이다. 참치캔은 1982년 동원산업이 처음 내놓은 제품이다. 선진국에서 보편화되어 있던 참치캔을 한국에 처음 소개한 것인데 이것이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참치캔 시장 1위(시장 점유율 약 70%)인 동원참치의 매출액만 약 3000억 원에 달한다.
‘스팸’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캔햄도 1980년대 초반에 등장했다. 스팸은 이상하게도 유독 한국에서 큰 사랑을 받았다. 캔햄 시장에서 1위 (시장 점유율 약 50%)인 CJ제일제당의 연간 매출액은 약 4000억 원이다. 통조림 시장에서 참치캔과 캔햄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두 제품이 명절선물세트의 중요한 품목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선물로 주어도 부담 없는 가격과 유통기한이 매우 길다는 점 때문에 참치캔과 캔햄은 저가 선물세트 시장에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1975년 4대 통조림 회사 중에는 없었지만 지금 통조림 시장에서 중요한 회사 중 하나는 간장으로 유명한 샘표다. 1974년 통조림 시장에 진출한 샘표는 깻잎, 장조림 등 반찬 통조림 시장의 강자다.

최근 식품산업에서 HMR(가정간편식)의 비중이 커지고 있다. 맞벌이 가구와 1인가구의 부상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통조림의 기술적인 강점은 언제든 부각될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냉장고도 조리시설도 집에 없는 1인가구에게 통조림은 가장 간편한 가정간편식이기 때문이다. 배달음식과 편의점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는 1인가구라도 참치캔 정도는 집에 비축해둔다. 그렇게 본다면 통조림의 기술적인 생명력은 앞으로도 오래도록 지속될 것 같다.


글 : 이덕주 기자(매일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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