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길위에서

예술과 문화, 낭만과 열정의 도시들

위대한 예술가의 발자취를 찾아 떠나는 유럽여행
브뤼셀에서 외할머니의
따뜻한 조개탕 같은 음식을 만나다

유럽 여행의 행복 중 하나는 걸어 다니면서 샌드위치를 먹는다든가, 잠깐 벤치에 앉아 종이컵에 담긴 스파게티를 먹어도 전혀 어색하거나 부끄럽지 않다는 점이었다. 더 많이 보고, 더 열심히 생각하고, 더 마음속에 많은 것을 새겨두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먹는 시간을 아낀 적도 많았다. 맛집을 탐방하며 부지런히 음식의 참맛을 음미하는 세심한 성격도 아닌 나는 여행 책자를 볼 때도 ‘꼭 먹어야 할 현지음식 베스트 3’ 같은 칸은 훌쩍 건너뛰곤 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것은 굉장히 큰 실수였다. 꼭 맛있는 현지 음식을 못 먹어서 안타깝거나 아깝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 지방의 음식을 이해한다는 것은 곧 그 지방 사람들의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을 이해하는 데 있음을 내가 놓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브뤼셀에서 나는 뜻밖에 내 입맛에 딱 맞는 현지식 요리를 발견하고 ‘고향의 따뜻함은 꼭 태어난 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다시금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브뤼셀 표 홍합 요리였다. 난생 처음 먹어보는 브뤼셀 표 홍합 요리는 시골 외할머니가 끓여주신 조개탕처럼 아련한 향수를 자극했다.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꾸밈없이 소박한 요리 솜씨를 연상케 하는 홍합찜 요리에 홀딱 반한 나는 브뤼셀에서 2박 3일 머물면서 홍합 요리를 두 번이나 먹었다. 한 번은 마늘 소스에 버무린 홍합 찜을, 한 번은 토마토소스에 버무린 홍합 찜을 맛보았다. 나름 브뤼셀 식 요리법과 한국식 요리법의 차이도 느껴졌다.

한 냄비 속에서도 섞이지 않는 맛,
브뤼셀 요리

내가 평소에 좋아하던 오징어 볶음이나 해물탕은 강한 양념이 재료의 원래 맛까지 침범하는 매콤한 요리였는데, 이곳 브뤼셀에서 나를 행복하게 해준 해물요리는 홍합의 두 껍질이 서로 꽉 맞물려 있어 어떤 강렬한 소스를 뿌려도 홍합의 속살까지는 양념이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껍질에 고이 싸인 홍합의 속살은 어떤 홍합 요리를 먹든 똑같은 맛이고, 껍질 밖을 감싸고 있는 소스와 야채만이 천차만별로 변화하는 것이었다.
재료가 지닌 본래의 맛보다 훨씬 드센 자극적인 양념으로, 재료와 양념이 각각 강렬하게 서로를 자극하여 제 3의 맛을 내는 한국식 요리와 달리, 브뤼셀의 요리는 재료와 양념의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서로 아무데서나 가리지 않고 뒤섞이는 한국 요리의 느낌이 열정과 적극성으로 다가온다면, 재료와 양념이 따로 또 같이 평등하게 공존하는 브뤼셀의 요리는 어딘가 고요한 성찰과 관조의 느낌으로 다가왔다. 엄청난 오지랖으로 서로를 챙기는 한국 문화가 피로한 대신에 정겨움이 넘친다면, 한 냄비에 있으면서도 서로를 건드리지 않는 양념과 재료처럼 타인의 고독을 존중해주는 서양 문화는 고요한 대신 끝없는 외로움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두 나라 모두 아주 비슷한 테이블 문화가 있었다. 바로 오래오래 음식의 온도를 간직해주는 세라믹 법랑 냄비가 홍합의 열과 향을 보존해주었던 것이다. 벨기에 식 법랑 세트를 보니 나는 우리의 된장뚝배기가 떠올랐다. 음식이 식탁 위에 있는 동안은 먹는 사람이 서늘한 냉기를 느끼지 않도록 배려하는 브뤼셀의 음식 문화, 한국 문화와 많이 닮아 있었다. 아닐까.

헤르만 헤세의 걸작들이 탄생한
스위스 몬타뇰라
‘위대한 예술가들의 발자취’가 풍요롭게 남아있는 장소를 찾아 떠나는 여행은 늘 기억에 오래 남는다. 일상으로 돌아왔다가도 또 다시 여행가방을 싸는 일이 반복되는 이유이다. 예술가의 발자취는 박물관에만 남아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태어나고, 살아가고, 묻힌 곳’도 포함된다. 나는 헤르만 헤세의 삶의 흔적을 찾아 독일 남부의 보덴 호수 지역과 스위스의 작은 마을들을 찾아다녔다. 그 속에서 ‘도시의 아름다움’에만 길들어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베를린과 뮌헨처럼 큰 도시에서 작품활동을 하라고 설득하는 친구들의 조언을 뿌리치고, 헤세는 스위스의 아름다운 마을 몬타뇰라에서 [데미안],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유리알유희] 등의 걸작을 쏟아내고 마침내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한다. 나는 헤르만 헤세가 40년 동안 살았던 몬타뇰라의 골목길을 걸으며 험준하게만 느껴졌던 알프스가 이토록 정겨운 동네 뒷산일 수도 있음에 새삼 놀라곤 했다. 몬타뇰라 쪽의 알프스는 별다른 등산장비 없이도 동네 뒷산처럼 쉽게 오를 수 있었다. 헤세는 몬타뇰라라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비로소 세속의 욕망에 찌들지 않는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았던 것이 아닐까.

강렬한 색채의 도시,
아를에서 고흐를 만나다
화가가 그림을 그렸던 장소를 찾는 것도 예술기행의 묘미다. 내가 가장 가고 싶었던 도시 중 하나는 고흐가 <밤의 카페 테라스>를 그렸던 아를이었다. 얼마나 아름다운 마을이기에 고흐는 평범한 카페를 그토록 아름답게 그릴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나는 고흐가 그토록 예찬했던 아를의 색채가 특히 궁금했다. 아를의 눈이 시리도록 푸르른 하늘빛, 나무들과 꽃들이 저마다 자신이 지닌 최고의 빛을 뿜어내는 자연의 오케스트라, 고흐가 그린 아를의 여인들이 뿜어내는 살아있는 광채. 그 모든 것들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1년에 300일 이상이 맑고 화창하다는 축복받은 땅 프로방스의 중심, 아를의 색채. 그것은 길가의 해바라기들마저 ‘고흐빛 노랑’으로 보이는 행복한 착시였고, 밤하늘의 별마저 고흐가 그린 ‘밤의 카페 테라스’의 해맑은 군청색으로 보이는 즐거운 환상이었다.
예술가의 멈출 수 없는 열정의 흔적이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곳, 단지 현지인들만 살기 좋은 곳이 아니라 여행자들에게도 한없이 따스하며 영감을 불어주는 장소. 고흐의 열정은 그렇게 그가 머물렀던 모든 도시를 찬란하고 향기롭게 물들이고 있다.

수련의 도시이자 모네의 정원, 지베르니 모네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장소는 바로 지베르니다. 모네가 수련 연작을 죽을 때까지 그린 곳이 바로 이곳이며, 그가 젊은 시절 새로운 형태와 색채를 연구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떠돌았던 여행을 멈추고 완전히 정착한 곳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 고흐가 해바라기나 붓꽃, 농부나 우체부의 인물화를 통해 무한성을 추구했다면, 고흐는 연못 위에 떠 있는 수련을 통해 무한성에 다다르고 있었다. 젊은 시절 모네도 고흐 못지않게 방황하며 수많은 도시와 농촌, 해변 등을 전전했지만 모네는 다행히도 ‘가족’이라는 최소한의 공동체에서 만족을 얻었고 지베르니라는 인구 300명의 작은 마을에서 지상의 천국을 발견했다. 지베르니는 파리와 멀지 않으면서도 파리의 복잡함을 피할 수 있는 아름다운 은둔의 장소였다. 모네가 정착하기 전까지는 인구 300명의 작은 마을이었던 지베르니는 이제 전세계에서 매년 수백 만 명의 관광객들이 찾는 최고의 명소가 되었다.

지베르니를 찾는 여행자들의 목적지는 하나같이 ‘모네의 정원’이다. 모네가 평생 머무르며 연못과 온실을 만들고, 무려 여섯 명의 정원사를 고용하여 온갖 꽃들과 나무들을 심고 가꾼, 모네에게는 제2의 고향 같은 곳이다.

모네의 집이자 화실이고, 모네 학파의 산실이며, 인상주의의 성지(聖地)인 이곳으로 들어가는 입구부터 관광객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힘겨운 어린 시절을 보낸 모네는 우선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안정된 환경에서 작업하기를 간절히 소망했는데, 그 소망에 딱 맞는 집을 구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파리 변두리의 여러 마을을 전전하던 모네는 마침내 지베르니에서 안식의 거처를 찾았다. 처음에는 지금처럼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집이 아니었다. 지베르니는 파리 사람들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 작은 마을이었고, 동네 주민들은 낯선 예술가 모네를 경계했으며, 모네 또한 아직 ‘이곳이다’라는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한 해 한 해 꽃과 나무들이 늘어갈수록, 그저 ‘관상용’으로 심었던 수련이 그에게 ‘최고의 오브제’이자 ‘눈부신 뮤즈’가 되어갈수록, 모네는 지베르니에서 살아있는 낙원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모네와 그의 아내 까미유, 아이들, 정원사들이 모두 나서 맹렬하게 꽃과 나무를 심고 가꾼 결과, ‘꽃의 정원’과 ‘물의 정원’은 하루가 다르게 눈부신 변신을 거듭하는 인공의 천국이 되어갔다.

내 심장은 항상
지베르니의 머무르고 있소
젊은 시절의 모네는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 자신을 떨리게 하는 색채를 찾아 세계 곳곳을 여행했다. 하지만 몇 번의 실패를 거쳐 지베르니라는 ‘인공의 낙원’을 만들어내고는 더 이상 세계를 떠돌지 않았다.
지베르니 전체가 온갖 색채의 향연이 펼쳐지는 거대한 팔레트였고, 모네는 호수의 물빛과 하늘빛, 바람의 세기와 태양의 광선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수련의 모습을 때로는 춤추는 요정처럼, 때로는 명상에 잠긴 수도승처럼 그려내기 시작했다. 호수에서 피어나는 평범한 수련이 그토록 천변만화한 표정과 몸짓과 색채로 이 세계를 수놓을 수 있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커다란 감동을 느꼈다. 단순히 관상용으로 심었던 수련이 이제는 다시 없는 뮤즈가 되어 모네로 하여금 끊임없이 새로운 빛의 세계로 인도하고 있었다. 모네는 두 번째 아내 알리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 심장은 항상 지베르니에 머무르고 있소.” 그래서일까. 지베르니에는 아직도 모네의 심장이 뛰고 있는 듯, 예술적 감성으로 가득하다.

예술가의 발자취를 따라 떠나는 여행은 마치 ‘영원히 끝나지 않는 여행’처럼 마음 깊은 곳에 오랫동안 기억의 둥지를 튼다. ‘예술사적 사건’의 장소를 탐험하는 여행은 필연적으로 ‘공부’를 요구하지만 기꺼운 일이다. 내가 사랑한 작품들, 내가 동경하는 예술가들이 남긴 자취를 따라가는 여행을 하다 보면, 오래전 세상을 떠난 그들이 마치 우리 곁에서 아직도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걸고 있는 듯한 행복한 환청이 느껴진다.장소들을 여행하다 보면, 오래전 세상을 떠난 그들이 마치 우리 곁에서 아직도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걸고 있는 듯한 행복한 환청이 느껴진다.

정여울 작가.
<마흔에 관하여>, <내가 사랑한 유럽top10>,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저자.
KBS1라디오 ‘백은하의 영화관, 정여울의 도서관’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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