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품으로 보는 역사

 

설탕과 밀가루

요즘 우리에게 설탕과 밀가루는 건강에 안 좋은 식재료의 대명사다. 식품회사들은 설탕을 뺀 제품을 내놓고 건강을 위해 밀가루를 끊는 사람들도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푸대접을 받는 설탕과 밀가루는 사실 아주 오래된 역사를 가진 식품이다. 두 식품은 우리보다 먼저 산업화된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왔고 우리에게 서양 음식문화의 상징적인 제품이 되었다. 우리나라 식품산업의 역사도 우리가 식품소재인 설탕과 밀가루를 직접 생산할 수 있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식문화사 연구자인 이은희 박사와 주영하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20세기 초 조선을 지배하게 된 일본은 한국에서도 곧 설탕과 밀가루 생산을 시작한다. 대일본제당 평양공장이 1920년대에 건설되었고 일본인 소유의 밀가루 공장이 조선 곳곳에 세워졌다. 일본은 당시 식민지였던 대만에서 가져온 원료당을 평양공장에서 정제해 조선과 만주에서 유통시켰다.

설탕과 밀가루로 만든 빵과 과자는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 상류층만 먹을 수 있던 고급 식품이었다. 하지만 피지배자인 조선인도 자연스럽게 이를 맛볼 기회를 얻게 되었고 이에 곧 매료된다. 특히 1930년대 조선에는 설탕을 넣은 얼음을 뜻하는 ‘아이스께끼’를 여름에 먹는 것이 크게 유행하기도 했다. 조선인들이 느꼈던 이 ‘맛의 충격’은 비유하자면 어린아이가 태어나서 처음 사탕과 초콜릿을 먹어봤을 때와 비슷했을 것이다. 아이가 사탕과 과자를 사달라고 부모를 조르는 모습은 이 당시의 신문과 문학작품에 처음 등장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해방 후 분단이 이뤄지면서 남한에는 제당공장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병철 회장은 한국전쟁 후 일본에 고철을 판매하고 대금으로 설탕을 들여와 유통해 큰돈을 벌었다. 설탕에 대한 수요는 여전했기 때문에 수입으로 이를 대체할 수 밖에 없었고 이를 국산으로 대체하는 것이 초기 대한민국 정부의 중요한 과제였다. 이때 가장 먼저 만들어진 제당회사가 바로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가 만든 제일제당(현 CJ제일제당)이다.

제일제당은 삼성그룹 최초의 제조업 회사이며 지금은 CJ 그룹의 가장 큰 회사다. 그런데 제일제당 설립 발기인(주주)을 보면 이병철 회장 외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 있다. 효성그룹 창업자인 조효제, 영진약품 창업주 김생기, LG그룹 창업주 구인회의 동생 구영회, 허만정 GS그룹 창업주의 장남 허정구가 참여했다. 제일제당 설탕을 판매하는 회사였던 한국정당을 만든 이양구 동양그룹 창업자까지 포함하면 지금의 삼성, CJ, LG, GS, 효성, 오리온 그룹이 모두 제일제당과 인연이 있다. 제당회사가 워낙 중요한 회사였기 때문에 당시의 내로라하는 기업가들이 대거 주주로 참여했던 것이다.
제일제당을 필두로 우리나라에 제당회사가 하나둘 설립됐다. 대표적으로 대한전선 그룹의 대동제당(현 대한제당), 삼양그룹의 삼양사까지 차례로 만들어지면서 지금의 제당 3사 체제가 완성되었다. 1955년 만들어진 대한제당협회는 일부 변동은 있었지만 지금도 이 3개 회사만 회원자격을 유지하고 있다.

쌀소비 줄이기 위해 장려된 밀가루 소비 우리나라에서는 평안도와 강원도에서 주로 밀을 재배했고 이를 가지고 면을 만들어 먹었다. 하지만 재배면적이 넓지 않아 일제강점기에도 밀은 여전히 귀했다. 빵이나 국수를 만들어 먹기는 했지만 밀이 주식인 쌀을 대체하지는 못했다.
설탕과 달리 밀가루는 해방 후 남한에도 공장이 많았다. 일본인들이 운영하던 제분공장이 한국인들에게 불하되었는데 이때 만들어진 회사가 대선제분, 동아제분(현 사조동아원), 대한제분, 신한제분(현 삼양사)과 같은 회사다. 1957년 삼화제분, 1959년 영남제분이 설립되고 1958년 제일제당이 제분사업에 진출하면서 지금은 7개의 제분회사가 우리나라에 있다.
귀했던 밀은 미국의 원조물자로 밀가루가 풀리고 원맥 수입이 활발해지면서 훨씬 구하기가 쉬워졌다. 그래서 저렴한 밀가루로 귀한 쌀을 어떻게 대체하는지가 정책적인 과제가 되었다. 밀가루 소비를 늘리는 혼분식장려운동이 시작된 이유다.
밀 소비는 우리 국민들이 접해보지 못한 새로운 음식이 등장하면서 늘어나기 시작했다. 1963년 삼양식품에서 처음으로 인스턴트 라면이 나왔고 1969년에는 인스턴트 칼국수도 나왔다. 수제비, 칼국수, 잔치국수, 쫄면, 만두, 쌀떡볶이 같은 소위 ‘분식’이 나타난 것도 1960년대 이후다. 화교들에서 시작해 지금은 한국인의 쏘울푸드가 된 짜장면도 우리의 식생활을 바꾼 밀가루 음식이다. 이런 식품들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제분회사들이 충분한 밀가루를 공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국민들의 1인당 밀 소비량은 1980년대 들어서 1인당 30kg대로 정착돼 지금까지 큰 변동이 없다. 우리 국민들의 육류, 과일, 채소류 섭취가 늘어나서 쌀과 밀 같은 곡물 소비가 줄어들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흔해진 식품은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다 설탕과 밀가루는 정말 우리 건강에 안 좋은 식품일까. 서양에서는 우리나라보다 설탕과 밀가루를 훨씬 많이 먹으면서도 건강하게 살고 있다. 우리가 설탕과 밀가루의 문제점으로 지목하는 것은 사실 설탕과 밀가루에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우리가 너무 과식을 한다는 것에서 나온다. 탄수화물 섭취가 많아서 문제인 것이지 설탕이 과일(과당)보다 더 나쁘고, 밀가루 음식이 쌀밥보다 더 나쁘다는 것은 비과학적인 생각이다.
그렇다면 설탕과 밀가루는 왜 사람들의 미움을 받게 되었을까. 이 같은 현상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세계적에서도 공통적인 현상이다. 식품산업을 오래 취재하면서 공통적으로 발견한 것은 대량생산을 통해서 저가에 판매되는 식품에 대해서 선진국의 대중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나라도 한때는 설탕이 부자들만 먹을 수 있는 것이었고, 밀가루로 만드는 과자나 빵이 귀한 음식이었다. 그러나 생활수준이 높아지고 먹을 것이 흔해지면 사람들은 저렴하고 흔한 것보다는 비싸고 희귀한 것을 찾는다. 또, 그런 식품이 더 건강하고 안전하다고 믿는다. 그런 믿음이 비록 비과학적이고 근거가 없는 것이어도 말이다.

글. 이덕주 기자(매일경제)
사진제공. CJ제일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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