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품으로 보는 역사

밥보다 커피

커피콩 하나 나지 않던 한국이 커피공화국이라 불린다. 특히 인스턴트커피의 소비는 전세계 1위의 위엄을 자랑한다. 커피와, 설탕, 프림이 황금비율로 배합된 커피믹스의 역사는 대한민국에서 시작되어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뜨거운 물만 부으면 커피의 맛과 향을 즐길 수 있는 믹스커피는 커피의 대중화에도 큰 역할을 했다.

언제 어디서나 다양한 맛과 형태로 즐길 수 있는 현대인의 필수품 커피. 그러나 불과 50년 전 만에도 커피는 일반 서민들은 접하기 어려운 상류층의 사치품 중 하나였다. 이런 커피가 일반 가정에 보급되고 대중화된 계기는 1970년 커피전문기업 동서식품이 인스턴트 커피를 발매하면서부터다. 1987년에는 세계 1위의 식품기업 네슬레도 '테이스터스초이스'로 국내 커피시장에 진출했다. 진출 5년 만에 국내 커피시장 점유율 40%에 달하는 등 빠른 속도로 성장한 네슬레는 2014년에는 막강한 유통망을 보유한 롯데그룹과 손잡고 롯데네슬레코리아라는 ‘합작법인으로 전환했다. 2010년에는 남양유업이 커피시장에 가세하면서 국내의 커피믹스 시장 규모는 더욱 커졌다.


인스턴트커피의 시작 국내에서 커피가 직접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1968년 창립한 동서식품에 의해서였다. 1970년 동서식품이 출시한 '맥스웰하우스 코피'는 우리나라에서 탄생한 최초의 인스턴트커피였다. 동서식품은 부평에 공장을 짓고 원두를 직접 수입해 1970년부터 인스턴트커피 맥스웰하우스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커피불모지였던 우리나라에 커피 대중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인스턴트 커피가 등장하기 전에는 알커피(원두커피)라고 불리는 로스팅된 커피 원두를 갈아서 마시는 이들이 있었으나 그리 대중적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인스턴트 커피의 등장으로 뜨거운 물에 녹이는 것만으로 쉽게 커피를 마실 수 있게 되면서 서울의 다방에서나 마시던 커피를 가정과 직장에서도 쉽게 마시게 된 것이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던 커피도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동결건조공법으로 만든 고급 커피 동서식품은 1970년대 말부터 동결건조공법의 새로운 커피제품 개발을 추진했으니 바로 맥심커피였다. 그러나 파트너사인 제너럴푸즈는 최고급 품질의 동결건조공법이 필요한 맥심보다 분무건조공법의 그래뉼 커피가 먼저 개발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동서식품에서는 그래뉼의 단계를 뛰어넘어 맥심 개발을 추진했으나 당시 파트너사였던 제너럴푸즈는 동결건조공법의 커피 개발에 소극적이었다. 영하 40도 이하에서 전공정이 진행되는 최고급 품질의 동결건조공법을 도입하기에는 한국의 커피시장이 충분히 성숙하지 않다고 본 것이다. 또한 동서식품의 기술력으로는 복잡하고 거대한 동결건조공정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미국에서도 1960년대 후반에야 이 공법의 커피가 생산되기 시작했고 일본에서도 1970년대 초반 들어 생산이 이루어졌으니 제너럴푸즈의 판단이 무리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한국 경영진의 강력한 의지에 따라 결국 파트너사의 동의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1978년 10월 새로운 공정을 이용하는 세가지 브랜드(맥심, 맥스웰 그래뉼, 맥스웰 상카)의 기술도입 계약이 일괄 체결되는 성과를 얻게 된다.
먼저, 1980년 10월 1일 동결건조 커피 맥심이 출시되었다. 50g과 200g의 병 포장 제품과 업소용인 지관 포장 제품으로 시판되었다. 출시 1년, 하루 1톤씩 생산해도 수요를 감당하지 못할 만큼 소비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맥심의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은 동서식품은 1982년 맥스웰 그래뉼과 맥스웰 상카를 추가로 시장에 내놓았다.

커피의 고정관념을 깬 혁신

믹스커피가 등장한 것은 한국에서 인스턴트커피가 출시되고도 6년이 지난 후인 1976년의 일이었다. 커피믹스가 출시하게 된 배경에는 1974년 국내 최초의 커피 크리머인 ‘프리마’ 개발이 있었다. 이러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동서식품은 1976년 12월 세계 최초로 커피와 크리머, 설탕을 이상적인 비율로 배합한 커피믹스를 선보이게 됐다. 빨리빨리 문화와 딱 맞아떨어진 커피믹스는 한국인의 삶 속으로 빠르게 파고 들었다. 다방 커피에 길들여진 한국인의 커피 취향을 저격한 배합 비율이 인기의 비결이었다. 출시 당시 커피믹스 한 봉지에 45원. 커피믹스의 탄생은 커피 대중화의 혁명과도 같았다. 커피가 상류층의 사치품이란 인식이 여전히 남아있던 상황에서 간편하고 저렴한 커피믹스가 등장하면서 커피는 서민의 일상에 깊숙이 파고들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로서는 커피, 프림, 설탕을 한 봉지에 넣는다는 발상 자체가 획기적이었다는 후일담도 전해진다.업계에서는 1997년 IMF 사태가 커피믹스 시장을 성장시켰다는 우스갯소리도 떠돈다.

이전까지는 커피, 프림, 설탕 등을 직접 타서 마셨지만, 구조조정으로 직원들이 줄어들면서 임원들도 직접 커피를 타 마시는 상황이 됐다는 것이다. 1987년 테이스터초이스로 국내 커피시장에 진출한 네슬레는 오랫동안 병커피 판매에만 주력하다가 2006년에는국내 최초로 커피와 설탕만 넣은 블랙커피를 출시했다. 덕분에 평소 블랙 커피와 익숙하지 않은 소비자들도 부담 없이 블랙커피를 즐길 수 있게 된다.
이처럼 국내 커피믹스 시장은 동서식품과 네슬레로 양분되어 있었으나 남양유업에서 2011년 ‘프렌치카페 커피믹스’를 출시하고 도전장을 내밀면서 커피믹스 시장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동서식품은 2011년에 인스턴트 원두커피까지 출시하게 된다. 커피믹스처럼 물만 부으면 원두 커피의 맛을 느낄 수 있는 획기적 제품이었다. 카누는 커피전문점에서 원두커피를 추출하는 방식인 에스프레소 추출 방식으로 짧은 시간에 저온으로 뽑은 커피를 파우더로 만든 제품이다. 커피를 내리는 복잡하고 번거로운 과정 없이도 커피전문점에서 즐기는 커피의 맛을 즐길 수 있게 된 것.

캔 커피의 등장, 걸어 다니는 커피전문점 휴대성이 좋은 캔 커피의 등장으로 커피는 더욱 즐기기 쉬운 음료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대한민국에 캔 커피가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986년의 일이다. 동서식품의 맥스웰하우스는 지난 1986년 출시 이래 약 30여년 간 꾸준히 소비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동서식품의 스테디셀러 캔 커피다. 이후 1991년 롯데칠성에서도 1991년 ‘레쓰비’. 2007년에는 프리미엄 원두 캔커피인 칸타타가 출시되었다. 특히 칸타타는 국내 원두캔커피 시장 40%를 점유하며 부동의 1위 자리를 지키고 있을 정도로 여전히 인기가 많은 제품이다. 레쓰비, 칸타타뿐만 아니라 바리스타, TOP, 조지아 같은 커피음료까지 포함하면 연간 매출이 모두 1000억 원이 넘는다. 이처럼 우리나라 커피시장은 비교적 늦게 출발했지만 선진국을 따라 잡는 속도는 한국의 경제성장 속도만큼이나 빨랐다.


글 : 이덕주 기자(매일경제신문)
사진제공 : 남양유업(주), 네슬레코리아, 동서식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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