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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에는 사과 맛이 없다  단지 사과 향이 존재할 뿐이다

혀로 느끼는 맛은 단맛, 짠맛, 신맛, 감칠맛, 쓴맛뿐이다. 그렇다면 사과 맛, 바나나 맛 등은 어떻게 느낄 수 있는 것일까. 이것은 맛이 아니라 향일 뿐이다. 향이 맛을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음식의 맛을 좌우하는 향이란 과연 무엇인지, 향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아보자.

바나나우유가 억울하다 “사과에는 사과 맛이 없다. 단지 사과 향이 존재할 뿐이다.” 이것은 필자가 6년 전 ‘Flavor, 맛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가장 강조한 내용이다. 혀로 느끼는 맛은 단맛, 짠맛, 신맛, 감칠맛, 쓴맛 이렇게 5가지뿐이고 딸기 맛, 포도 맛, 고기 맛 등은 단지 향일 뿐인데 마치 바나나에는 바나나 고유의 맛 성분이 있어서 바나나 성분 전체가 바나나 맛을 내는 것처럼 생각했다. 그래서 우유에 바나나 향을 한 방울을 넣으면 바나나 맛이 나는 것을 가지고 그렇게 놀라고 불안해했다. 실제 바나나에서 바나나 맛을 내는 것도 0.1%도 안 되는 이소아밀아세테이트 같은 냄새 분자이고, 바나나 우유에서 바나나 향을 내는 것도 같은 분자인데 그랬다. 단지 바나나에 존재하는 이소아밀아세테이트는 바나나가 만든 것이고, 바나나 향에 존재하는 것은 인간이 다른 원료로부터 합성한 것으로 출처만 다른 것인데 그랬다.

세상의 모든 향은 다양한 향기 물질의 조합이라 어떤 향이든 포함된 향기 성분의 종류와 비율만 정확히 알고, 그 향기 물질만 구할 수 있으면 만들 수 있다. 과거에는 이런 향의 실체를 알지 못했고, 설혹 구성 성분을 안다고 해도 그런 물질을 구할 방법도 없었다. 그래서 향은 너무나 비싸고 귀한 것이었다. 그러다 분석 기술과 화학 산업이 발달하면서 과일 등을 분석하여 특유의 맛(향)을 내는 냄새 성분을 알 수 있게 되었고, 합성의 기술이 발전하자 개별 향기 물질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개별 향기 물질을 조합하여 새로운 향을 만드는 것이 가능해졌고 이를 조합향(소위 합성향)이라고 한다. 우유에 한 방울의 바나나 향을 넣어서 바나나 맛이 나게 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런 조합향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분야가 음료다. 과일의 맛을 좌우하는 것은 과일에 존재하는 10% 전후의 포도당, 설탕, 과당 등의 단맛 성분과 0.1% 정도의 구연산, 사과산 등의 신맛 성분 그리고 0.1% 정도의 향기 성분이다. 이를 흉내 내어 물에 과일과 비슷한 정도의 감미료, 산미료 그리고 향을 넣으면 그럴듯한 과일 맛을 낼 수 있다. 더구나 음료는 pH가 낮아서 멸균을 하지 않아도 된다. 향은 열에 약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산성의 음료는 높은 열처리가 필요 없고 제품의 부피와 시장 규모가 크다. 그래서 조합 향료의 30~40%가 음료에 사용된다. 향은 캔디, 젤리, 껌, 가공유, 아이스크림, 디저트 등 여러 제품에 사용되지만 그 양을 합해야 음료와 비슷한 규모이다.

합성향은 천연향에 비해 위험할까? 사람들은 합성향(=조합향)을 천연향에 비해 위험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천연향이 조합향에 비해 훨씬 복잡한 조성을 가졌고 검증되지 않은 성분을 가지고 있다. 커피에는 800종 이상의 향기 성분이 포함되어 있는데 다른 식품도 만만치 않은 종류의 향기 성분이 포함되어 있다. 빵, 녹차, 과일 등 어지간한 식품에는 수십 수백 종의 향기 물질이 포함되어 있다. 사과에는 사과 맛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과 향만 있다고 했는데, 사실은 사과 향도 사과 고유의 성분이 아니고 이런 냄새 물질의 조합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사과 향도 없고 사과 향처럼 느껴지는 냄새 물질의 조합만 있는 것이다.
천연향을 구성하는 물질을 하나하나 따져보면 식품에 허용하기 힘든 물질도 많다. 단지 그 양이 워낙 적어 충분히 안전한 수준이고, 그 성분을 따로 제거하기 힘들어서 허용한 것일 뿐이다. 우리나라에서 조합향료의 원료는 식품첨가물로 관리되기 때문에 원료 하나하나가 식약처에서 검증하여 사용이 허가된 품목만을 사용할 수 있고, 구성 물질이 천연향에 비해 훨씬 단순하다. 이론적으로는 천연향에 비해 조합향이 안전한 셈이다.

천연향의 한계와 조합향의 한계 그리고 천연향은 그 한계가 분명한 편이다. 천연물에서 향기 물질의 농도는 0.1% 이하이다. 그래서 향이 약한 편인데 조합향은 처음부터 향기 효과가 좋은 원료만을 조합하여 만들기 때문에 향의 강도가 강하다. 여러 가지 형태로 이용하기 좋다. 더구나 품질이 안정적이고, 부향 효과가 균일하다. 향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원하지 않는 특성은 줄이고 원하는 방향으로 조절할 수도 있다. 그래서 다른 제품과 차별화된 풍미를 가진 제품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조합향은 수확량과 시기 등의 공급 제한 요소가 없다. 환경 이슈로 천연 물질의 공급이 점점 힘들어지는데 조합향은 그런 식물 자원을 사용하지 않으므로 나름 환경 친화적인 요소도 있는 셈이다. 하지만 조합향도 한계는 분명하다. 특히 예전에 향료 원료와 기술이 부족했을 때는 조합향이 천연향에 비해 인위적이고 균형을 갖추지 못한 것도 많았다. 단지 몇 개 향기 물질로만으로 천연물의 풍부함을 흉내 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요즘은 천연물과 유사한 향조를 가진 조합향만이 사용된다.

사람들이 식품에 대해서는 유난히 보수적이어서 천연과 유사한 향을 좋아하지 자연에 없는 독특하고 독창적인 향을 사용하면 불안감과 거부감을 보인다. 하지만 아직 향료의 기술은 완전하지 못해서 자연의 모든 향을 흉내 내지는 못하고 있고, 천연향이 좀 더 미묘하고 풍부한 경우도 상당히 있다. 특히 커피, 바닐라같이 발효나 가열공정을 거쳐서 만들어지는 향의 경우에 그렇다. 수백 종의 향기 물질로 만들어진 천연물을 20~30여 종의 향기 물질만으로 재현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천연물에 있는 성분 그대로 만들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런 경우에는 천연물을 사용하는 것이 훨씬 저렴하고, 천연물에 있는 향기 성분 중에는 식품에 사용이 허용되지 않는 것도 많다. 더구나 가열로 만들어진 향 중에는 보관 시 안정성이 크게 떨어져 시간이 지나면 금방 향이 변하는 성분도 많다. 갓 구워낸 빵의 풍미를 조합향을 통해 구현할 기술은 없는 것이다. 향신료는 향기 물질이 세포의 조직 안에 갇혀 있어 액체로 된 조합향보다 내열성이 있지만 한계가 있다. 향 분자들은 뜨거워질수록 휘발성이 강해져 더 쉽게 탈출하고, 반응성도 커져서 쉽게 변한다.
향기 물질은 열에 약하지만 산화에도 약한 편이다. 향신료를 분쇄할수록 열에 의해 변하기 쉽고 공기에 노출되면서 산화되기 쉽다. 허브를 자를 때 날카로운 칼을 이용해 조심스럽게 자르면 변화가 적지만 무딘 칼을 사용하여 부수면 조직의 손상이 많아 색과 향이 빨리 변하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산화가 모두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혼합 향신료의 경우 시간이 충분히 지나 숙성이 되면 풍미가 더 그윽해지는 경우도 있다.

미각, 후각에 이어 온각과 촉각까지 자극 하는 향 향신료 중에는 미각이나 후각뿐만 아니라 온도감각(통증)을 자극하는 것도 있다. 고추, 후추, 생강, 겨자, 서양고추냉이, 와사비, 산초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의 자극성이 강한 이유는 맛과 향이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온도 수용체를 강력하게 자극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온도를 감각하는 데 대표적인 수용체가 15도 이하를 감각하는 TRPA1, 25도 이하를 감각하는 TRPM8, 33~39도를 감각하는 TRPV3, 그리고 43도 이상을 감각하는 TRPV1이다. 고추의 캡사이신은 우리 몸에서 43도 이상의 가장 뜨거움을 감각하는 TRPV1를 자극한다. 그리고 장뇌(camphor), 후추의 피페린(piperine), 마늘의 알리신(allicin)도 TRPV1을 자극한다. 그래서 이들 물질을 먹을 때 작열감을 느낀다. 이들 말고도 대부분의 향신료에는 온도 수용체를 자극하는 물질이 한 가지 이상 들어 있다. 겨자나 와사비의 주성분인 이소티오시아네이트(isothiocyanate), 마늘의 알리신(allicin), 디설파이드, 시트러스 과일의 시트랄(citral), 생강의 진저롤(gingerol), 타임(thyme)의 티몰(thymol), 계피의 신남산알데히드(cinnamaldehyde)는 가장 차가운 온도를 느끼는 TRPA1을 자극한다. 그리고 박하의 멘톨(menthol), 장미의 게라니올(geraniol), 유칼립투스의 유칼립톨(eucalyptol)은 시원함을 느끼는 TRPM8을 자극한다. 오레가노, 장뇌, 정향에는 따뜻함을 느끼는 TRPV3을 자극하는 성분이 있다. 향신료의 가장 큰 매력은 이처럼 다양한 요소를 통해 사람들을 지루할 틈이 없게 한다는 점인지도 모른다.

최근 가장 핫한 것이 마라이다. 마라란 중국어로 ‘맵고 얼얼하다’라는 뜻으로 우리가 여태 먹었던 매운맛과 다르다. 마라에는 기존 향신료에 없는 좀 더 특별한 자극 즉 촉각을 자극하는 성분마저 있다. 마라의 매운맛의 주역은 쓰촨 산초이고 이 초피나무 열매에는 3퍼센트 정도의 알파 산쇼올(hydroxy alpha sanshool)이 있는데 이것은 캡사이신의 매운맛과는 다른 '얼얼한 맛(마痲)'을 제공한다. 초피가 많이 들어간 음식을 먹다 보면 입술이나 혀, 입천장 등 여러 부위가 저리고 얼얼한 걸 느낄 수 있는데, 산쇼올은 4가지 촉각 수용체 중에 가벼운 진동을 느끼는 수용체(Aβ and D-hair neurons)를 활성화시키기 때문이다. 온도 수용체는 원래 온도에만 반응하여야 하는데, 실수로 캡사이신이라는 화학분자에 반응하는 것처럼, 촉각을 담당하는 수용체도 실수로 물리적인 자극이 아닌 산쇼올이라는 화합물에도 반응하여 마치 피부가 떨리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2013년 영국의 유니버시티 칼리지 연구팀은 산쇼올 성분을 입술에 발랐을 때 초당 50회 진동하는 것과 비슷한 자극이 일어나는 것을 확인하였다.

사람들은 같은 자극을 지루해하고 좀 더 강한 자극을 원하지만 단일한 자극이 너무 강한 것에는 거부감이 있다. 자극이 복합적일수록 합창이나 오케스트라처럼 풍부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마라에는 미각과 후각도 있지만 온각과 촉각마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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